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선생이었던 지라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은 녹여였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때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퇴계 선생의 시 한 편이다.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아 갔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
두향에게 보내는 시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도산서원 매화
퇴계 선생과 매형(梅兄)
선생께서는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유별나
"내 평생 즐겨함이 많지만 매화를 혹독하리 만큼 사랑한다"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적고, 매형이라 불렀습니다.
퇴계는 생전에 매화를 매형 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꼈다고 한다.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매화와 묻고 답하며 풀어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
하며 밤을 지새워 시정(詩情)에 취하기도 하셨어요.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밤 늦게 홀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달이 떠올라 매화나무 가지위에 걸린다.
이윽고 산들바람이 살랑사랑 불어오니 그 바람을 타고 향기가 온 뜰과 집 방안에 까지
가득찬다는 정경을 마치 눈앞에서 그림 그리듯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寒과 團과 間의 세 운(韻)자가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향의 묘
충북 단양의 장회나루. 강 건너 산 기슭에 두향의 묘가 있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면 멀리서 볼 수 있으며,
직접 두향의 묘를 찾아 가려면 단양군청의 허가를
두향은 본시 기녀가 아니었으나 5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퇴기(퇴기)인 수양모 아래서 자라 10살 때 기적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는 얼굴도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화에도 특히 매화와 난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여 수청기생을 자청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
두향과 퇴계는 중령 하나를 상이에 두고 다양과 풍기로 헤어져사는
동안 두향은 남한강 강성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야금을 타서 그소리에
그리움을 실어... 사모하는님에게 뛰엇다는 애뜻한 아야기~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垂楊梅 거꾸로 피는 매화)를
보고 지은 시는
도수매(倒垂梅)
一花?背尙堪猜 胡奈垂垂盡倒開
일화재배상감시 호내수수진도개
賴是我從花下看 昴頭一一見心來
뢰시아종화하간 묘두일일견심래
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노산 이은상도 이곳에 들려 시한수를 남겼다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말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 날 애국투사 못돌아 온 이가 얼마인데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한 수 주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