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자 치료제, 프란치스코
요즘 계속해서 들려오는 새로운 교황님과 관련된 소식을 접하면서
교황님께서 자신의 교황 명을 프란치스코로 택하신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일 제가 새로 선출된 교황이었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 교황님은 예수회 출신이면서도
이냐시오 로욜라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교황 명으로 택하지 않으시고
프란치스코를 택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엔 제 개인적으로 꽤나 의아해했습니다만
이제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 것 같습니다.
새 교황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셨던
중세교회의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과도한 물욕에 젖어있는 교회, 명예와 자리에 연연하는 교회,
교회의 보물인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회,
겸손과 섬김의 교회가 아닌 교만과 아집의 교회,
작고 소박한 교회가 아니라 번쩍 번쩍 초호화, 초대형 교회,
가난한 양떼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이 제몫만 챙기려는 부자 교회…….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당시 많은 교회가 영성이나 쇄신,
이웃 사람의 실천은 뒷전이고 외형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성당 안은 진귀한 보물이나 예술품으로 치장을 해서 호화찬란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 한 가지 외형은 대단했지만
교회는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쓰러져가는 우리 교회,
우리 인류에게 아주 향기로운 선물이자 치료약을 하나 선물로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쓰러져 가는 제도 교회의 마지막 기둥을 꽉 붙들고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가식과 위선의 겉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가장 낮은 자로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서,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제도 교회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프란치스코는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음성에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열심히 성당을 수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온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던 중 그 수리가 단순히 성당의 수리가 아니라
권력과 탐욕에 빠진 교회의 영적 쇄신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가난의 특징은 사회적응의 실패로서의 가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비참하고 궁색한 가난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속적 안녕과 물질만능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기해방의 도구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완벽한 가난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을 통해 대자유인이 된 프란치스코는
가난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나 초조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기에 만민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새로운 교황님께서는
지금 제2의 프란치스코 영성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어찌 그리도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모릅니다.
새로 임명된 신임 주교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교는 왕자가 아니라 교구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목자여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교구에 충실하십시오.
교구를 자주 떠나는 ‘공항’ 주교가 되지 마십시오.”
최근 하신 말씀은 너무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성직자 중심의 관료제도와 출세제일주의자들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 청년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세계를 병들게 하는 가장 심각한 죄악은
청년 실업과 노인들의 고독입니다.”
우리 역시 교황님께서 시작하신 제2의 프란치스코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순간입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깊이 한번 반성해봐야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녕 우리 공동체의 중심이고 선물인가?
가난한 이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무런 소외감이나 차별대우 느끼지 않고
우리 공동체에 편입되고 있는가?
살레시오 수도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