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 설화 ☆...오순도순 나눔 °♡。
망부석 설화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징으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보냈더니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한, 눌지왕 때에는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결국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지아비의 죽은 소식을 들은 후
그의 아내는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울산 ․경주 경계에 있는 재)에 올라가 멀리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죽은 몸은 돌로 화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은 수리새가 되어 날아가 산 아래에 앉았다. 새는 다시 날아 남쪽에 있는 한 바위 구멍으로 숨었다. 그래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니 치술령 산신이다.
사람들은 뒷날 새가 날아와서 앉은 자리를 비자현(飛自峴)이라 하다가 비조(飛鳥)라 부르니 두동면 만화리(斗東面 萬和里)에 있다.
은을암이라 하니 범서면 국수봉의 은을암이 그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장녀 아기(阿奇) 3녀 아경(阿慶)도 같이 울다가 마침내 죽었다한다. 이때 2녀 아영(阿榮)은 따라 죽을 수 없었다.
문량(文良)은 누가 거두어 기르리 하였다. 뒤로 신모사(神母詞)와 치산원을 세워 제사를 받들어 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만화리에 다만 그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치술령 위에는 오늘도 망부석이 매서운 눈초리로 멀리 왜국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그러나 그 가사와 곡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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