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신앙의 길잡이 26

성체와 함께 사는 우리

성체와 함께 사는 우리 - 마리아 마넬리 스테파노 신부 성체는 우리들 가운데, 우리를 위해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체 안에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몸과 피, 영혼과 신성으로 현존해 계신다. 성체와 함께 사는 우리는 실제적인 의미인 임마누엘 (마태 1,23,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체와 함께하는 생활만큼 하느님을 가깝고 친밀하게 모실 수 있는 신앙은 이 세상에 없음을 숙고하도록 진정으로 열렬히 권유하였다.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여전히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6,56)라는 말씀처럼 그분 자신이 우리..

사랑의 신비를 알라

사랑의 신비를 알라 네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너는 이 영원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사람들끼리의 사랑은 변할 수 있지만 하느님이 주신 사랑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도 늘 변함이 없다. 언젠가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는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아니면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네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임을 알고, 네 사랑의 한계..

하느님 닮기

하느님 닮기 창조세계가 주는 환희에 들떠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 하느님의 성품을 띄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크든 작든 환희를 통해 날마다 그 형상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가까이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담아 옴

묘방이 있다

묘방이 있다 / 차동엽 신부 현대의학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운 병증(病症)가운데 하나로 무력증이 있다. 이것이 의욕상시,우울증을 수반하게 되면 치유책이 궁해진다. 육체적 무력증 못지 않게 신자를 괴롭히는 것이 영적 무력증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우들이 시달림 속에서 호소하고 있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용서하고 싶으나 바늘 틈 만큼의 여유가 없습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싶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평안하고 싶으나 하릴없이 안절부절 못합니다. 행복하고 싶으나 까닭이 잡히지 않습니다 사목을 하고 싶으나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싶으나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고 싶으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복음을 잏었기 때문이다. 많..

회개를 통해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

회개를 통해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길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요, 하나는 두렵게 여기는 하느님이구요, 또 하나는 사랑에 가득해서 바라보는 하느님입니다. 두려움의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 어느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도 조금은 달라집니다. 두려움의 하느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으시는 엄하신 분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그 모든 죄마저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시고도, 인간을 완전히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금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그렇게도 무서우신 하느님이 이젠 좀 마음도 약하시다, 느껴지기도 합니다. 노아에게 긴 말씀으로 새로운 약속을 하시는 하느님, 징벌의 하느님치고는 이것저것 참 자상하기도 하시다..

작으면서도 동시에 큰 사람

작으면서도 동시에 큰 사람 사제는 작으면서도 동시에 큰 사람입니다. 그 정신은 왕가의 혈통처럼 고귀하고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은 시골의 작은 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이기는 데는 영웅처럼 하느님으로 무장하여 성화의 샘이 됩니다. 그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죄인, 저 높은 곳을 향해 갈망의 기치를 드높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의 종, 결코 권세 있는 자들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허리를 구부리는 주님의 제자이고 양떼들의 목자인 까닭에 겸허한 마음으로 손 벌려 구걸하는 이가 됩니다. 그로써 무한한 선물의 전달자이며 영적인 전쟁터에서 용사이지만 병든 이를 돌볼 때는 자상한 어머니가 됩니다. 주님 제가 지혜로 충만하지만 아이의 신뢰심을 가진 사람 이상은 높은 곳을 향하되 현실에..

목적없는 수단은

목적없는 수단은 예수님께서 오시길 기다리면서 하던 단식, 막상 그 예수님께서 오시고 나서도 그치질 않습니다. 이젠 아예 눈앞의 예수님마저 부정해가면서 공허한 기다림을 채워가는 나날들에 근엄함만이 무게를 더해갑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기다림의 시간에 공허로운 것들만을 좇아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다다르기 위한 길에 가장 큰 수단이자 목적은 무엇인가요? 사랑으로 시작되어 사랑으로 끝나는 길입니다. 단식, 기도, 봉사, 희생, 헌신 이 모든 것도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결핍된 채 근엄하고 절제된 단식으로 껍데기를 두텁게 부풀려왔던 바리사이들, 끝내 오신 예수님 앞에서도 그 완고한 껍데기를 단번에 벗어내질 못합니다. 수단이 목적이 돼버린 사람들이죠. 목적..

마음이 진선미에 물들면

마음이 진선미에 물들면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사람에게 무엇이 빛이라 할 수 있을까. 재산이 있으면 빛이고 없으면 어둠인가. 몸이 성하면 빛이고 불구면 어둠인가. 권세가 있으면 빛이고 없으면 어둠인가. 마음이 진선미에 물들면 빛이고 마음이 오류와 부패에 물들면 어둠입니다. 하늘의 진선미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3,19)”

때가 찼을 때

때가 찼을 때 기도의 드라마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났다. 복음서 안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들을 통하여 그분의 기도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다가가듯 거룩하신 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곧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 주시는지를 깨닫도록 힘쓰는 것이다. - 1분 교리

데오볼렌테(Deo Volente)

데오볼렌테(Deo Volente) 데오볼렌테 란 말은 라틴어로 "하느님이 허락하시면 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랜 역사를 거처오면서 "데오볼렌테"라는 말을 귀하게 사용해왔다. 그들은 장래 계획이나 무슨 약속을 할때 D.V 라는 싸인을 꼭하였다고 한다 그 뜻은 우리가 아무리 계획하고 약속을 철저히 하더라도 주님의 허락이 계셔야 한다는 뜻이다. D.V이라는 싸인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었고 기도였다. 야고보는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자포 자기하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버리며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찾으며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주님의 뜻을 먼저 찾고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을 일치 시키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 김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