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수성구 2021. 11. 15. 02:32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마카 1,10-64; 루카 18,35-43 / 20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눈이 담당하고 있는 시각은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약 70%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뇌 활동에서도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보통 사람이 하루에 접하는 시각 이미지가 대략 만 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시각 정보는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기려고 보는 경우에는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서 보고, 반대로 두뇌 활동을 쉬려고 잠을 자거나 깊은 생각이나 명상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눈을 감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이렇게 생활하지 못하므로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렵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구차하지만 구걸을 해서라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만난 눈먼 이는 자비를 청했고, 그 청원이 워낙 간절했던 덕분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습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두고 루카가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굳이 보도하는 까닭은 그가 눈만 뜨게 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사람이라도 영적으로는 소경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눈먼 이를 보게 하는, 그래서 신적 권능으로만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을 뻔히 보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여 적대시하였고, 끝내는 사두가이와 로마 총독까지 움직여서 정치적 반란자로 죽여버리기까지 하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는 반대로, 마카베오는 헬레니즘 시대에 사실상 무신론인 다신교 풍습을 강요받아서 분연히 일어셨습니다. 차라리 죽기로 작정할 만큼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에 동조한 형제들과 투사들은 혁명을 일으켰다가 희생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눈의 소중함도 배웁니다.

 

광범위하게 무신론과 우상숭배가 퍼져 있는 오늘날에도 육신의 눈이 멀쩡하면서도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올바른 지식을 얻기가 쉽지 않고, 더군다나 진리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눈먼 이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