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전삼용 신부님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지 않는 은총|………◎

수성구 2018. 2. 4. 03:58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지 않는 은총|………◎ 전삼용♡신부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지 않는 은총


2018년 나해 연중 제5주일
복음: 마르코 1,29-39

이탈리아 한 마을에 장난감 만드는 일을 하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없어서 늘 적적한 마음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내 질 좋은 떡갈나무로 피노키오란 인형을 만들고 아들처럼 아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보고 “부디 피노키오가 저의 진짜 아들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별에서 푸른 요정이 내려와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나무였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달라는 피노키오의 요청에 “네가 정말로 할아버지의 가족이 될 수 있을 만큼 착하고 용기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그땐 널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생명을 갖게 된 피노키오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피노키오는 하지만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피노키오를 서커스를 보여주겠다면 데려갔고 그것에 정신이 팔린 피노키오는 서커스의 광대가 되었습니다. 줄도 없이 움직이는 신기한 목각인형이기 때문에 서커스 단장은 돈벌이를 위해 그를 가둬놓습니다.

어느새 푸른 요정이 나타나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이런 곳에서 울고 있니?”라고 물으니 피노키오는 혼나는 것이 무서워 잡혀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코가 쑥쑥 길어졌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코는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온 피노키오는 등굣길에 또 늑대를 만나는데 늑대는 이번에는 피노키오를 어른들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며 당나귀로 만들어 되팔아버리는 섬에 팔아버렸습니다. 담배와 술과 어른들의 문화에 심취하다보니 피노키오도 반쯤 당나귀가 되어버렸습니다. 울며불며 후회하였더니 다시 푸른 요정이 나타나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이젠 제페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난롯가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다리에 불똥이 튀어 다리가 타버렸지만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반쯤 타버린 자신의 다리를 보며 아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울어버립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빠를 찾아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피노키오는 망가진 다리에 대충 나무막대를 이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찾아 나섰다가 큰 고래에게 잡아먹혀 뱃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피노키오는 아빠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도 고래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고래 뱃속에서 불을 피워 고래가 재채기를 하게 만들어 할아버지를 구하지만 자신은 정신을 잃고 맙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무가 아닌 인간의 몸을 한 피노키오가 되어있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피노키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노키오는 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린 동화입니다. 말썽장이 피노키오가 어른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을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즉 자신의 아빠의 부재(不在)였습니다. 피노키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계셨고 또 발에 붙은 불을 꺼 주었다면 피노키오는 또 늑대의 꾐에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반성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에게 가장 큰 교육이 되었던 것은 아빠의 부재였습니다. 아빠를 찾아 나서면서 참으로 아빠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고 다시는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잠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찾는 이들을 떠나시는 것이 곧 사랑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가신 곳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첫 네 어부 제자들만 부르셨을 복음전파 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고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병을 낫게 하시어 그 부인이 당신을 시중들게 하신 것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아만이 아니라 그 가족도 보살펴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왜 낮에 데려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회당에 안식일이기 때문에 가셨던 것 같습니다. 해가 지면 움직일 수 있고 예수님께서 언제 떠나실지 모르니 계실 때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를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갖가지 앓는 질병을 다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 입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좋아할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은 의인에게서 찬미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밤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신 뒤에 이른 새벽 아직도 깜깜할 때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줍니다. 시몬과 일행이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그렇게 하실 것을 정하셨을 수도 있고 또 베드로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결정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예수님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떠나야 할 때이기에 다른 고을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서도 똑같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어쩌면 이 복음은 우리가 사람들과 언제 헤어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시고는 다른 고을로 떠나셨습니다. 만약 당신을 좋아하는 이들 안에만 머무시려 했다면 참 복음 선포자의 모습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빛은 어둠이 있는 곳을 향해야합니다. 그 곳이 다 밝혀졌다면 다시 어둠을 찾아 나서야합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붙들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하고 말씀하신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는 그 사람들이 이미 당신을 찾는 것을 넘어 당신을 증언할 사람들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떠나시는 분입니다. 이는 마치 아가서의 신랑과 같습니다. 신랑이 신부와 행복한 시간을 갖다 갑자기 이유 없이 사라집니다. 신부는 신랑을 찾아 해매입니다. 옷도 엉망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 신랑의 묻다보니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초죽음이 되었을 때에야 신랑은 신부를 만나줍니다. 신랑은 신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둘이 만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만남입니다. 떠남도 하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심으로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 먼 곳까지 찾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분명 아프고 마귀 들린 이들이 남아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마지막 교육으로 어둔밤을 허락하십니다.

어둔밤은 믿음이 생긴 이들에게만 허락하시는 당신의 부재입니다. 믿음으로 그 시간을 버티면 더 높은 경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기도로 치면 관상의 첫 단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다가 자신을 완전히 버려 정화가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버리는 것도 정화를 위한 교육의 일종입니다. 맹맹한 만남, 발전이 없는 만남을 하느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아픔을 겪더라도 조금씩 성장하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아졌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마음 아파할 필요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평생을 이 어둔밤 속에서 믿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둔밤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이제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시험입니다.

온갖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데 주님의 뜻은 알 수 없을 때 그래도 버틸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전에 만났던 모습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보일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재까지도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을 때 증명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이지 않으시는 것은 은총이 됩니다. 구약의 요셉도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완전해졌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그런 의도로 자신을 어둠 속에서 살도록 섭리하셨음에 놀라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고통과 어둠과 부재는 그분께서 더 가까이 계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교육법이기에 더 발전하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당히 우리 믿음을 증가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