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8년 저의 첫 번째 손주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빠인 조카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토론할 수 없으며,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문화 활동이고 여행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와의 다름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이렇게 다릅니다.
살았던 시간이 다르고, 생활했던 공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찾아온 약장수 무리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차력쇼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아이가 약장수 근처에 모입니다.
그때 약장수 무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약을 사지 않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애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4~5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예수님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다름의 차이인데 말이지요.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봉사하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불변의 법칙이며 그것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왕도이다(헨리 밀러).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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