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아름다운 글

모두 나의 선생님이었다

수성구 2014. 5. 23.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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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 아이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청정합니다. 어떤 조미료도 섞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얼굴입니다. 찡그리거나, 웃거나, 까불거나, 거드름을… more

 


모두 나의 선생님이었다



제자 종민이와 장호가 집에 왔습니다.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뒷산에 올랐습니다.
풀벌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걸으며
문학을 이야기했고 삶과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제자 아이들은 밤 9시가 조금 지나서 갔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 문을 열었습니다.
종민이가 사온 참외 상자와 장호가 사온
베지밀 상자, 오리온 종합선물이 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습니다.
저게 어떤 참외인데. 저게 어떤 베지밀인데.
무슨 돈이 있다고. 참외를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베지밀도 반으로 나누었고,
종합선물도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 김밥, 떡, 참외, 베지밀을 바리바리 싸들고
무의탁 할머니들이 살고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김복순 할머니의 야윈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할머니, 제자 아이들이 제 딸아이 먹으라고
참외도 사오고, 베지밀도 사오고, 종합선물도 사왔어요.
홍대 앞에서 음악을 하는 종민이는
새벽 5시30분이면 잠에서 깨어나
신문을 돌린 돈으로 이 참외를 사온 거구요.
교사가 되겠다고 시험을 준비하는 장호는
학원에서 점심 사먹을 돈으로
베지밀하고 종합선물을 사온 거예요.
저 혼자 먹을 수 없어서 가져왔어요.
제자 아이들은 꿈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아이들이에요.
할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성당 나가시잖아요.
종민이가 훌륭한 뮤지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장호가 훌륭한 선생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할머니…."
김복순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제 말을 하나도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사랑은 귀로 듣는 게 아니니까.
사랑은 가슴으로,
눈빛으로 소리 없이 환하게 하는 거니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나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모두 나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보물찾기』
(이철환 지음 | 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