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마음
어제 병진이의 성적을 매기며
B+과 A-를 왔다갔다 망설이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성적기록부를
연구실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내가 병진이의 점수를 확정한 것은
오늘 아침 출근길, 신촌 로터리에서였다.
대형 백화점 앞 횡단보고 근처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다가,
차창 밖으로 한 노인을 보게 되었다.
어림잡아도 여든은 되어 보이는,
몸집이 아주 작고 깡마른 그 노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역 입구에서 골판지 조각 위에 웅크리고 앉아
나무 부채 몇 개와 여자용 스카프를 팔고 있었다.
부채와 스카프, 겨울 품목으로는 이상한 선택이었지만,
아마도 노인의 앙상하고 쇠약한 몸으로
운반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노인에게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노인도 팔겠다는 의지를 잃은 듯,
추위에 몸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의 발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한 젊은이의 시선이
노인에게 계속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병진이었다. 병진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길이 건너기 시작하자,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물건들을 잠깐 살펴보다가
부채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병진이를 쳐다보는 노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며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만난 지 겨우 한 학기밖에 안 됐지만
병진이를 알고 있는 나는 그가 한겨울에
부채가 필요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학교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어제 빈 칸으로 남기고 간 병진이의
성적란을 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는
A라고 선명하게 써 넣었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저 | 샘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