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속성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10,25)
여기서 '더 쉽다'로 번역된 희랍어
'유코포테론'(yukopoteron)은
비교급으로서 불가능의 의미가 아니고,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바늘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
(trypematosraphidos)는 첫번째로
예루살렘성 같은데서 속칭 밤에 이용되던
'바늘귀문'이라고 해석한다.
밤에는 큰 성문이 닫히고,
밤에 누가 죽으면 시신을 성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개구멍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바늘귀문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 통과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짐을 지고 있을 때는
더 힘든 것이다.
따라서 이 바늘귀문을 통과하고 싶으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다. 한마디로,
이 일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이 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낙타를 통해 보여주신다.
두번째로 대부분 성서는 '낙타'(약대)로
번역된 '카멜로스'(kamelos)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소문자 사본은 '밧줄'을 의미하는
'카밀론'(kamillon)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몇 랍비 문헌에는 유사하게 코끼리가
작은 구멍을 통과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는 마르코 복음 10장 25절을
낙타의 속성을 통해 깊이 묵상할 수 있다.
낙타는 자신에게 필요한 식량을
미리 자기의 몸에 '비축'해 놓는 동물이다.
물도 풀도 없는 사막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미리
많이 먹어두고 마시기 때문이다.
낙타 등의 혹<물혹; 단봉(a one-humped)
혹은 쌍봉(two-humped)>은 바로
그 비축한 영양분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낙타가 640 kg이라면,
물혹은 그 10분의 1인 64 kg이다.
그리고 물혹안에는
물이 아니라 지방(기름)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열을
차단해주고, 밤에는 추위를 차단해준다.
낙타들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풀과
물을 보면 무조건 먹는다.
그 결과 다른 가축들이 먹고 마실 것을
부족하게 만든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양이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바늘귀문은 실꿰는 바늘의 귀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낙타의 목은 들어가지만, 자신의 자세를
낮추고, 무릎 꿇어 기어야 하며,
물혹을 깍아 내어야 한다.
우리는 낙타의 속성에서 하느님 대전에
부자의 속성, 우리 자신의 속성을
찾아내야 한다.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말한다.
라틴어에도,'Pecunia est alter Deus.'
(Money is the second God;
돈이 제2의 천주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애덕과 자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선교와 봉사와 사제나 수도자를
모시는 일같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복음(마르10,17-27)에서
돈의 위력을 하느님의 위력과
비교하지도 혼돈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메시지를 전한다.
복음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한
기본 조건인 십계명에 충실했지만,
주님의 제자되는 성소의 조건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는데,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그는 돈의 위력을 알기에 그것과 함께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수단과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을 섞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갈림없는 온전한
봉헌을 원하신다.
부자란, 비단 부(富)만이 아니라
권력, 명예, 지식, 재능 모두를 절대화하고,
그것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부자에게 하느님은 안 보이고,
그것들을 우상으로 숭배하게 된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투사해서
만든 神이므로, 바로 자기 자신을
神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전부 주실 수 있는 하느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수단들을 목적으로 하느님인양 바라보고
신봉할 때,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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