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묵상글

소명召命의 여정 - 만남, 발견, 버림, 따름 - 2022.2.6.연중 제5주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수성구 2022. 2. 7. 03:53

소명召命의 여정 - 만남, 발견, 버림, 따름 - 2022.2.6.연중 제5주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2.2.6.연중 제5주일 이사6,1-2ㄱ.3-8 1코린15,1-11 루카5,1-11

 

 

소명召命의 여정

- 만남, 발견, 버림, 따름 -

 

 

어제 성가 연습 시간에 있었던 평범한 ‘더불어’의 따뜻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난생 처음 저녁성무일도서 안티포날레를 깜박 잊고 지참치 못해 그냥 부르던중 이를 알아 챈 옆에 있던 형제가 말없이 웃으며 슬며시 다가왔습니다. 이어 형제의 성무일도서를 펴들고 함께 성가를 연습했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책이 없을 때 옆에 동무와 함께 정답게 동무의 책을 함께 펴들고 읽던 추억이 생각나 순간 마음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일희일비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늘 한결같이 새롭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런 일어날 힘을 주는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고 살아 온 삶의 원리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소명의 여정’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어진 소명의 여정입니다. 오늘 두 독서에 이어 복음은 소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 2독서는 바오로, 그리고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두 어부들의 소명에 관한 일화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연인 듯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님은 한 눈에 어부들의 갈망渴望을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어부들은 평생 단조로운 고기잡이 일상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우리의 경우와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가르침을 계속하신 후 말씀을 마치시자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면서도 내심 시몬을 주목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고 받은 내용이 깊은 의미를 함축한 화두처럼 들립니다. 바야흐로 주님과 어부 시몬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흡사 우리 한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평범한 일상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깊은 데를 찾아 어디 밖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여기가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입니다. 바로 베드로에게 이를 확인시켜준 주님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없는 삶의 허무를 말해 줍니다. 평생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마음을 여전히 공허할 뿐입니다. 마음의 허기虛氣는 여전하며 삶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강원도 오두막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던 고故 법정 스님에게 어느 분이 던졌다는 화두 같은 말씀도 생각납니다.

 

“스님,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흡사 의미없는 삶, ‘텅 빈 충만’이 아니라 ‘텅 빈 허무’의 삶 같습니다. 여전히 삶은 무지의 어둠입니다. 다음 시편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일미사후 낮기도를 대체하여 바치는 시편 126장은 부를 때 마다 새롭습니다. 바로 주님이 삶의 의미임을 밝혀 줍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짧은 시간 잘 자고 나서 이렇게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과 어부 일행입니다. 새삼 주님이 함께 계신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의미를 풍부히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몬 베드로의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반응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참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발생한 은총의 체험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자기를 발견한 구원의 체험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한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명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해 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와 흡사한 이사야의 소명 체험입니다. 사랍들 천사들의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듣고 보는 중 이사야는 주님을 만났고 동시에 참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미사중 “거룩하시다” 환호는 여기에 근거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지는 사랍들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입에 대고 말합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흡사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해당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의 죄는 없어지고 우리의 죄악은 사라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좌우간 이런 강렬한 소명 체험의 기억은 이사야의 평생 삶에서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소명 체험의 고백도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돌리는 바오로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소명을 체험한 이들의 공통점은 겸손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자기를 발견했을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소명을 체험했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주님의 소명 체험을 통한 참자기의 발견뿐입니다. 복음 말미의 시몬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사라지는 무지의 어둠이요 두려움입니다. 삶은 소명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복음 선포의 삶이 시작됨을 뜻합니다. 마지막 결론같은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에 이은 모든 것을 버림, 예수님을 따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부의 삶에서 제자의 삶으로 운명이 바뀐 이들입니다. 새삼 소명의 여정은 만남, 발견, 버림, 따름의 일련의 요소로 이뤄짐을 봅니다. 소명의 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만남의 여정, 발견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소명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소명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