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양심은 신앙을 의미한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18.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희망이란 무엇일까
(5) 희망의 바탕인 양심(「간추린 사회교리」 73항)
그리스도인에게 양심은 신앙을 의미한다
김사부: 아무리 돈이 없고 화가 나고 무시당하고 자존심 상해도 절대로 타협하지 말아야 될 게 있어.
그게 바로 양심이라는 거야. 넌 그 양심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해 봤어? 어디까지 버텨 봤는데?
넌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잖아. 니 욕심대로 돈만 된다 그러면은 양심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다 팔아 처먹으면서!
임현준: 나도 할 만큼 했어요! 나도 양심껏 살아 보려고 기를 쓰고 했는데
그런데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나도 억울하다고!
김사부: 양심하고 욕심하고 헷갈리면 안 되지.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맨날 너만 억울하지.(‘낭만닥터 김사부2’ 14회 중)
삶을 바라보며
톨스토이는 학문 중에서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합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관조를 강조한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즐겨라) 같은 말도 있고,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며 희망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며 가난한 것이 사랑 없는 부유함보다 낫다”(르블랑 모리스)는 낭만적 희망도 있으나
반대로 윌리엄 새커리는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을까?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은들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허영의 시장」)라는 말로 삶의 허무를 통찰하기도 합니다.
살아온 삶도 다르고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저마다 바라보는 세상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고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모든 것을 식별하게 하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줍니다.
양심에 대한 가르침
가톨릭교회는 양심에 대해 라틴어로 ‘콘시엔티아’(Conscientia)라고 해서 ‘함께 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양심을 ‘하느님의 목소리’이자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새겨 주신 법이라고 가르칩니다.(「사목헌장」 16장)
인간은 육신과 영혼, 마음과 양심, 정신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존재이며 양심은 윤리적 당위와 선악을 구별하는
인간의 능력과 의지라고 합니다. 동시에 양심은 우리 내면의 가장 은밀한 곳이자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至聖所)입니다.
마음의 법정, 고해소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이 양심에 대한 표현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대표적으로
스승을 배신했던 유다(마태 27,4)와 베드로(마르 14,72)를 통해서 양심과 관련된 가책 현상을 묘사합니다.
반면 서간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되는데 사도 바오로는 양심에 대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신앙에 의해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로마 14,23 참조)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양심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실수와 잘못이 발생한다는 점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윤리적 판단을 중요하게 의식해야 하고, 이를 위해 양심의 자극을 인정해야 하며
양심의 자극을 인식하는 능력을 기르고 이 능력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올바른 희망의 바탕인 양심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도 양심에 대해 많이 언급합니다. 인간을 이루는 황금률이며(20항 참조),
개인이나 교회 모두에게 그 양심이 중요하다고 합니다.(71항) 무엇보다 사회교리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며(73항) 교회의 사회교리는 하느님 말씀과 사회적 책임의 실현, 자유, 양심, 윤리를
식별하는 도구라고 가르칩니다.(77항) 우리는 풍요 속에서 양심이 무디어진 현실을 바라보기도 하고,
궁핍함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양심을 저버리는 현상도 체험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양심을 시험합니다.
지금 세상의 가장 큰 적은 무엇입니까? 돈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의함도 개의치 않는다는 마음입니다.
세상이나 이웃, 양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참담하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생각에 진정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양심이 사라진 곳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양심이 사라진 인생 그것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떳떳할 수도 없으며 늘 하느님을 피해 사는 삶이 아닐까요? 사랑, 희망, 믿음,
꿈과 이상, 삶과 현실은 모두 올바름을 바탕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희망은 양심에서 시작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신학적 성격, 특히 윤리 신학의 성격을 지닌다.
‘사람들의 행동에 지표가 되는 데 목적을 둔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양심이 세계의 상황과 만나는 곳에 있으며, 개인 신자들, 가정,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그리고 정치인들과 국가 통치자들이 수행하는 노력에서 그 자체가 드러나,
역사 안에서 이 교리의 구체화와 적용이 이루어진다.”(「간추린 사회교리」 73항)
[가톨릭신문, 2021년 5월 9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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