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19,25)
[이사야서 해설]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19,25)
오래전 어느 잡지에서, 매달 주제를 바꿔 가며 빈칸에 넣고 싶은 말을 공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나에게 가족은 [ ]다’라는 식의 문장에, 각자 떠오르는 단어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사야가 살던 시대 유다 왕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 ]에 대한 신탁.’ 참고로 이사야서에서 신탁은 거의 심판 선고입니다.
민족들에 대한 심판(13-23장)
기원전 8세기, 하느님께서 어떤 나라를 심판하신다면,
당시 유다인들은 어느 나라를 가장 먼저 떠올렸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기원전 8세기 근동 지방의 가장 큰 세력, 모든 전쟁의 원천,
나훔이 그 수도를 “피의 성읍”(나훔 3,1)이라고 불렀던 나라, 아시리아일 것입니다.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 전쟁에 시달리던 유다인들은 ‘아시리아에 대한 신탁’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모스서, 에제키엘서 등 여러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선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1부에서 그러한 민족들에 대한 심판은 13-23장에 모여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신탁’입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신탁’이 꼭 심판 선고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말라 1,1),
이사 13-23장에서는 일정하게 심판 선고를 도입하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시리아에 대한 신탁’이 없습니다.
이 ‘신탁’들은 바빌론에 대한 신탁(13,1–14,23), 모압에 대한 신탁(15,1–16,14),
다마스쿠스에 대한 신탁(17,1-11), 이집트에 대한 신탁(19,1-25),
바닷가 광야(바빌론)에 대한 신탁(21,1-10), 에돔족(두마)에 대한 신탁(21,11-12),
드단족(아라비아)에 대한 신탁(21,13-17), ‘환시의 계곡’에 대한 신탁(22,1-14),
티로에 대한 신탁(23,1-18)으로 구분되어 있고, 도입하는 말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필리스티아에 대한 신탁도 있습니다(14,28-32).
우리의 추리력을 동원해 본다면,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빌론에 관한 신탁”(13,1)이 힌트입니다. 이 신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사야의 시대가 아니라
더 늦은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것이지요.
13-23장 전체가 같은 시대, 같은 저자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빌론 임금의 종말을 고하고(14,3-21) 이스라엘의 귀향을 선포하는 단락은(14,1-2)
명백하게 더 늦은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시리아에 대해서는(10,5-19)
이사야서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 선고는 더 일찍, 10,5-19에 나옵니다.
이사야 자신도 40년이나 활동했고 내내 아시리아는 위협적이었으므로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단락에서 아시리아는 하느님의 “진노의 막대”(10,5)라고 일컬어집니다.
엄청난 군사력을 지녔던 아시리아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짓밟았습니다.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때 유다의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힘을 빌려
시리아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막아 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지 않고 명맥을 이어갈 뿐 그 이후 남왕국 유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실상 아시리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도구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10,6)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가 대단해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10,5) 하느님을 믿지 못했던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 손의 힘으로, 내 지혜로’(10,13)
세상을 정복했다고 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다른 나라들을 멸망시킨 것과 똑같이
이스라엘도 자기 힘으로 굴복시켰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도구로 쓰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교만을 벌하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10,15) 하느님은 아시리아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도록 그 영화가 사라지게 하시고 그를 멸망시키십니다(10,16-19).
인간이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스스로 잘난 줄 알 때, 하느님은 그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시리아는, 자신이 지녔던 그 막강한 힘도 오직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고 불의와 억압을 저지른 잘못에 대해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거만한 눈은 낮아지고 사람들의 교만은 꺾이리라.
그날 주님 홀로 들어 높여지시리라”(2,11). 역사를 쥐고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주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바빌론에 관한 신탁”(13,1)
13-23장에서 선포되는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 역시 같은 신학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압, 필리스티아, 이집트는 그렇다 치고 저 멀리 에티오피아까지(18,1-7),
이러한 민족들에게 신탁이 내린다는 것은 그들도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법은 우리나라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지요.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을 우리나라 법정에서 재판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티로와 시돈과 시리아가 하느님의 통치 영역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민족들에 대해
하느님이 심판을 선고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 가면 더 중요하게 부각될 주제입니다.
땅에 구역이 나누어져 있어서 여러 신이 자신의 구역과 자기 백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이 한 분이신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13-14장에 실려 있는 바빌론에 관한 신탁은 이미 바빌론이 메디아인들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까지 예고하고 있습니다(13,17 참조).
물론 기원전 8세기의 본문이 아니라 유배 중의 본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포되는 내용은 앞서 아시리아에 대해 선포된 내용을 이어갑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에 대해 선포되었던 말씀이 더 늦은 시기에는
아시리아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바빌론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바빌론 역시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져야지”(14,13-14)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구로써 땅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위치에 앉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승으로, 구렁의 맨 밑바닥으로”(14,15) 떨어집니다.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19,25)
6,13의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라는 말씀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치실 때 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들을 치실 때는 어떨까요?
하느님이 아시리아를 꺾으시고 바빌론을 치신 것은
그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목적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느님은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19,25) 하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내 손의 작품”은 본래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원수였던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하느님을 알게 될 때 하느님은 그들을 강복하십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이 될 것이다”(19,24).
이스라엘이 이 말씀을 얼마나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 선고에 ‘[ ]에 대한 신탁’이라는 제목이 있다면 이스라엘은 분명
그 빈 자리에 ‘이집트’, ‘아시리아’를 써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마저도 그들이 당신을 알아 구원을 얻는 길이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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