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맛들이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
제가 사목하고 있는 피정 센터 외곽 오솔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넓은 갯벌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환상적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최근 제 게으름으로 인해 잡목과 잡풀들이 우거지고, 길도 여기저기 훼손되어 버렸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으로 요즘 14처 순례길을 조금씩 복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예초기와 전기톱을 돌리면서 시원하게 단장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에 십자가의 길을 정비하는 일은 제 개인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적인 프로그램이 되고 있습니다. 작업 도중 한숨 돌리는 시간에는 홀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칩니다. 공동체와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도 괜찮지만, 나 홀로 여유 있게 묵상하면서 바쳐보니 더욱 실감이 났습니다.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에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악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또 넘겨집니다. 우선 전임 대사제 한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예비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1차 심문을 끝낸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후 현직 대사제 카야파에게로 넘깁니다. 2차 심문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카야파는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당시 유다 최고 의회는 사형 언도나 집행의 권한이 없었으므로, 4월 7일 금요일 새벽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빌라도 총독 관저로 압송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기로 작정하고 언도 공판을 시작합니다. 금요일 정오 무렵 마침내 빌라도는 헤로데 궁전 앞 '리토스트로토스', 우리 말로 번역하면 ‘돌 포장이 잘 된 광장’이라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사형 언도를 내립니다.
올해 저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때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한 처 한 처 묵상을 하고 있는데,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는 수치스러움, 놀려대며 깔깔대는 군인들의 웃음소리, 사악한 인간들의 판결을 묵묵히 받아들임, 쇳덩어리가 달린 채찍질로 인한 과다 출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은총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혹독한 고통, 1킬로미터 남짓한 처형 장소까지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의 기진맥진….이번 사순 시기,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실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처지로 한번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사순 시기는 늘 삶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교회적으로, 전례적으로, 성사적으로 그리스도 수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으로 선포해야 합니다”(칼 라너 신부).
2021년 3월 14일(나해) 사순 제4주일 수원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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