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마음 바구니에는 ◑* 햇살 한 줌이 소담합니다. 그대 두고 간 마음이 반짝입니다. 바람 한 결에도 상큼합니다. 살아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당신도 내게 축복입니다. 나도 당신에게 축복이 되고 싶습니다. 기분 좋은 하루는 이런 느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좋은 느낌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푸른 하늘, 맑은 바람, 행복한 미소 등등 그러면 당신은 어느 새 그것들과 하나가 되어 있을 겁니다. 마음에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만일 마음에 어둠이 있다면 당신은 어두운 표정이 되는 것이고 마음에 성냄이 있다면 당신은 성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빈 광주리와도 같습니다. 빈 바구니를 채우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당신의 마음 바구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푸른 하늘 맑은 바람 예쁜 꽃 넓은 바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찬 당신의 마음 바구니를 모두에게 내보여 주십시오. 그순간 세상은 온통 축복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 '행복한 미소' 중에서
마음 가는대로 그리는 그림처럼
사람은 관계를 중요시하면서 관계를 통해 때로는 나를 보곤 한다.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친구인지 적인지 모호한 상태를 프레너미라고 한다.
프레너미란 말도 참 재밌는 말이다. 사회심리학 용어라지만 현대인들은 참으로 복잡한가보다. 오늘의 동반자가 내일의 적이 되고야 마는 상황을 보면서 감정의 찌꺼기로 남아 개운치 않은 소모를 하고 털어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프레너미는 친구와 적이라는 합성어이며 혐오 또는 경쟁자인데도 친절한 사람 또는 적의 특성을 함께 갖는 사람이다. 프레너미란 말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 말의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직장에서도 비즈니스 파트너십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서서히 비공식적인 작업환경과 사람의 직업과 개인 생활을 연결하는 밀접한 관계가 흔해서 그럴지 몰라도 프레너미식 관계는 비즈니스 거래 또는 경쟁에 대한 공통된 관심 때문에 일반적이 됐다.
보통 친구와 적은 동일한 사람인 경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친밀한 친구인 동시에 적으로 내 마음에 감정적인 삶에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것이다. 본인의 필요에 의해 다가가는 사람의 일방적인 관계, 그런가 하면 친구의 허락 없이 친구의 삶에 간섭하는 경우나, 겉으로는 칭찬과 친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겉과 속이 다른 적과 친구로 위장한 프레너미는 주관적인 생각으로 겉으로는 협력으로 이끌지만, 경쟁심으로 인해서 결국은 속마음이 들어나 버리는 상황이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프레너미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까?
마음을 추스르고 잊어버리려고 애써 위안하지만, 사람에게 느껴지는 마음이 가혹하다. 변해버린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다가오는 사람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그저 봄날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또 추운 겨울이 오듯이 계절과 인연은 지나가는 것이고 그 무엇도 한탄하지 말자고 내게 주입시킨다. 세월의 유연함으로 단단해 져 가는 것도 나이 듦의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사회현상이라지만 프레더미 관계가 많아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래도 내게는 대처방안이 있고 훌륭한 방어기제가 있으니 다행이다.
그 일은 바로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다. 그림은 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걷는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움을 가슴으로 그리기 위함이다. 요즘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시국일 때나 관계에 심신이 지쳤을 때도 그림은 도피처도 되어주니 깊은 위안이다.
생활의 어려움은 내가 소유하는 일을 했을 때 만족감은 떨어진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어려움이 있어도 멀리 내다봤을 때 만족감은 분명 더 있다.
앞으로는 소유하고 원하는 일보다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시대가 가까워졌다. 코로나로 인한 생활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테고 행복은 개인의 창의성을 성취해 가면서 살 수 있을 때 가능함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관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다 보니 몰랐지만, 코로나로 볼 수 있게 된 현 상황을 보면서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렇듯 코로나 바이러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요구한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도 혼자 있는 일이다.
혼자서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내성만큼은 건실하니 조르바가 부럽지 않을 자신이 있다. 프레너미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려내고 풀어내서 형상화시켜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연구실에 와서 냉장고에 얼려둔 대봉감과 핸드드립 한 커피를 연하게 해서 마실 수 있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니까... 오늘은 약간의 떡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더 간절해진 학생들과의 소중한 대면수업 시간도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 이영우 (배재대 교수:·대전 국제 아트쇼 조직위원장)
마음의 소리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시대, 당장 내일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불확실한 시대의 트랜드가 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찾아라’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해 말하는 ‘소확행’ 마저 누릴 수 없는 현실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오늘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를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이 있다면 그건 멈춰서 마음에게 묻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존재가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답은 모두 그 사람 안에 있다.(ICF코칭철학)’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 답이 있다는 것인지 찾을 길이 없다. 아무리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해도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면 판단과 분별이 먼저 올라온다. 그리고 ‘~~해야 한다. ~~하면 안된다’
책임과 의무, 역할로 가득 채워져 마음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산책과 명상을 통해 침묵 속에 머물러 보는 것이 좋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소리가 멈춰야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 오감이 살아나도록 일상 속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무엇이든 느껴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변의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거나 냄새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음식을 먹을 때도 눈으로 음식에 집중하고, 하나하나 감사한 마음으로 꼭꼭 씹으며 그 소리와 촉감, 냄새를 한껏 느껴본다.
그리고 그 음식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했을지 생각해 본다.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주물러주며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피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몸의 촉각을 되살리고, 스스로 돌보지 못했던 몸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나 책 속에서 발견한 단어나 문장도 머리로 판단해 생각하기보다는 가슴으로 품어본다. 그렇게 가슴과 오장육부를 통과시킨 말과 글에는 머리로 생각해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울림이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소리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너무 성급하게 대답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가슴에 잠시 품어본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까지 가지고 내려간다. 이때 깊은 호흡이 도움이 된다.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가 내쉬면서 가슴에 품었다가 다시 내쉰다. 알아차림, 깨달음, 통찰 등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생각,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곳까지 생각이 미치게 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작이다.
더 깊은 마음의 소리, 더 힘이 있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죄책감과 타인을 비난하고 탓하고 변명하는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타인으로 향하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 깊이 깨닫고,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타인의 조언이나 승인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세상의 불안과 어려움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내면의 인도에 따라 평안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의 신성을 깨워 그 소리를 들으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가나 혁신적인 그룹의 지도자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대부분 명상을 하거나 신앙을 갖고 있다. 부디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당신의 신성과 속히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