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
밥에 물기가 많으면 ‘밥이 질다’고 표현하죠? ‘설이 질다’는 말은 설에 눈이 많이 온다는 뜻입니다. ‘보름이 밝다’는 말은 날씨가 좋아 대보름에 밝은 달이 잘 보인다는 뜻이고요. 즉, 이 속담은 설에 눈이 많이 와야 좋고, 대보름은 날이 맑아야 좋다는 뜻인데요. 무엇이 좋고, 왜 좋다는 걸까요?
설은 섣달그믐 무렵으로 춥고 밤이 길 때입니다. 맹추위가 오락가락하는 시기라 설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이 시기의 날씨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요. 그런데 설 전후 날씨가 질어(습기가 많아) 눈이 오면, 날씨가 푸근하고 흰 눈 때문에 주변이 밝아져 일하기도 좋고 더불어 아이들과 놀기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설날에 눈이 오면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 해요. 눈이 농작물을 덮어 이불 구실을 함으로써 동해(凍害)를 예방하고, 토양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기 때문이죠. 대보름에 날이 맑은 것이 좋은 이유는 날이 맑아야 환한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사회였던 과거에는 달이 매우 신성시되었는데요. 대보름에 날이 맑아 커다란 보름달을 볼 수 있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올해 설날은 날씨가 어떨까요? 조상의 지혜가 담긴 이 속담대로 올 한 해 풍년을 맞이하도록, 설은 질고 보름은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꿩 대신 닭
‘꼭 적당한 것이 없을 때 그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종종 사용되는 꽤 대중적인 속담인데요. 하지만 이 속담의 유래가 ‘설날 음식’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나요?
설날의 대표적인 명절 음식은 ‘떡국’입니다. 언제부터 설날에 떡국을 먹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등의 문헌에 정조차례(正朝茶禮, 새해 차례)와 세찬(歲饌)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떡국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떡국은 적어도 조선 시대부터 먹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떡국을 만들 때 우리 조상들은 반드시 꿩고기를 넣어 끓였습니다. 설날 떡국에 꿩고기를 넣는 이유는 꿩고기가 맛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꿩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상들은 꿩을 ‘하늘의 닭’이라 여기고 길조로 생각해 농기 꼭대기에 꿩의 깃털을 꽂아 두기도 했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를 보면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 올린 떡국의 육수도 꿩고기로 끓여 낸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요. 하지만 집집마다 꿩고기를 구하기는 어려워서 가정에서 기르는 닭을 잡아 떡국에 넣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그렇게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답니다. 요즘에는 꿩 대신 소고기, 북어, 매생이, 굴 등 취향이나 지역 특색에 따라 떡국에 다른 재료를 넣기도 합니다. 올해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는 떡국에 무엇을 넣을 계획이신가요?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을 꺾어 가지고 간다
처가에 새해 인사를 하러 갈 때, 연한 홍색으로 발그레 피어 오른 앵두꽃을 꺾어 간다니, 얼핏 보면 로맨틱한 이야기 같습니다. 앵두꽃이 피는 시기는 4월과 5월 사이로 봄이 완연한 때입니다. 세배는 정초에 하는 것이 상례인데, 앵두꽃이 피는 봄이 되어서야 처가에 세배하러 간다니…. 뭔가 꿍꿍이가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이 속담은 정말 앵두꽃이 필 때가 되어서 처갓집에 세배를 간다기보다는, 그만큼 여유를 갖고 천천히 간다는 의미를 과장해서 표현한 속담입니다. 정초에 서둘러 처가에 세배하러 가려는 애처가를 조롱할 때 쓰거나, 반대로 늦게 처가에 세배하러 가는 것을 합리화할 때 이 속담을 썼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처갓집 세배는 보름 세고 간다’, ‘처갓집 세배는 보리누름에 간다’, ‘처갓집 세배는 살구꽃 따 가지고 간다’, ‘처갓집 세배는 한식 지나서 간다‘ 등 유사한 속담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요. 비슷한 속담이 한두 개가 아닌 것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처갓집 세배에 늑장을 부리는 남자들이 있어 왔던 것 같습니다.
최근 5년간의 이혼 통계를 분석한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설날과 추석 등 명절을 지낸 후의 이혼 건수가 명절 직전 달보다 평균 11.5% 증가하는 등 명절과 이혼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속담이 부디 경각심을 주는 속담으로 작용하면 좋겠습니다.
정초에 거름 질 놈
우리 조상들은 정초에서 대보름까지 농사일을 잠시 쉬었습니다. 그 기간은 아직 날이 춥고 눈이 산야에 깔려 있어서 농사일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초에는 바깥일보다 새끼 꼬기 등의 집안 잡일을 하거나 집 안팎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정초에 ‘거름 질 놈’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거름은 정초가 되기 전, 섣달(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다 치우고, 집을 깨끗하게 정돈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거름을 지고 정리에 나선 사람은 이미 끝내 놓았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한심하고 게으른 사람이지요.
비슷한 속담으로 ‘정초에 나무하러 갈 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거름과 마찬가지로 섣달에 나무를 다 해 놓고 새해를 맞아야 하는데, 정초가 되어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이니 준비성 없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새해는 새 마음, 새 뜻으로 새롭게 계획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묵은 것은 미리 정리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꼬집는 속담이 아닌가 합니다.
새해 못할 제사 있으랴
새해 제사는 조상에 제의를 올려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중요한 의미의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집집마다 설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해 조상들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새해에 못할 제사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 속담은 좀 더 자세히 풀면 ‘새해에 잘못 지낼 제사가 어디 있겠냐?’인데요, 즉, 설 제사는 어느 집이나 다 잘 지낸다는 뜻입니다. ‘남의 떡에 설 쇤다’는 속담처럼, 설 명절에는 음식 준비가 조금 미흡하더라도 이웃들이 워낙 다들 풍성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명절을 쇨 수 있을 정도로 설은 풍족한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새해에 못할 제사는 없을 것 같다’라는 뜻 같은데요.
사실 새해 제사 풍경을 빌려 말하는 이 속담의 진짜 의미는 ‘말로야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잘못하고는 매번 ‘다음부터 잘하겠다’고 하며 다짐하는 사람을 비꼴 때 쓰는 말이라고 해요. 늘 다짐만 하고 실천은 못 한 일이 있으신가요? 올 새해에는 모든 계획과 약속을 꼭 지키고 실행하셔서 보람차고 뿌듯한 한 해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