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행복 가득한곳

섬 집 아 기|◈─……

수성구 2019. 3. 24. 05:33

섬 집 아 기|◈─……행복가득한곳

       

  섬 집 아 기  



섬집아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굴 따러 간 엄마를 기다리며 집을 보는 아기와 아기 걱정에 굴을 따다 말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한 이 노래의 가사와 리듬은 한국인 누구의 마음 속에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다 못찬 굴바구니' 부분에서 아기를 염려하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한인현 시인의 노랫말인데, 그림 같이 아름답고도 슬픈 경험을 읊은 듯합니다. 한인현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특히나「섬집아기」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한창 일할 나이인 4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는 점이 미쳐 자료정리를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겠지만, 어찌 됐든 그와 관계한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섬집아기」는 6.25 전쟁의 와중에 탄생됐다고 전한다.

그 내력을 요약하면, 한인현은 함흥사범학교 졸업 후 첫 발령지로 경기도 가남국민학교에 재직하게 된다. 하지만 재직 중에 6.25 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가게 되는데, 피난살이 와중에 한인현은 부산 앞바다의 한 조그마한 섬에 놀러 가게 된다.

그때 한인현은 갈증을 느껴 바닷가 주변을 헤매다가 어느 한 오막살이집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오막살이집에는 잠자는 아기가 있었고, 거기서 낯선 방문객의 방문에 놀라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섬집아기"라는 동시가 창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느낌 충만은 한인현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갈마반도와 그 호도반도, 그리고 영흥만의 흰모래 빛과 자갈, 푸른 소나무 등과 같은 이미지와 맞딱드려지면서 마침내 「섬집아기」라는 동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섬 집 아기'의 작곡은 한인현이 이흥렬(1901~1980)에 부탁해 이뤄졌다. 이흥렬은 고향이 한인현과 같은 원산이었고, 일본 동경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한인현의 모교인 광명보통학교에 재직 중이었다. 이흥렬은 한인현의 동시인 "섬집아기"를 받는 즉시 곡을 붙여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동요시인 한인현(1921~1969)

작사가인 한인현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마식령산맥의 봉오리들이 영흥만 쪽으로 늘어져 내린 갈마반도 명사십리다. 그 원산 갈마반도 명사십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한인현은 원산 광명 보통학교를 거쳐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교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서울 은석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를 썼다. 해방 직후에도 우리글을 잃었던 아이들을 위해 <민들레>라는 동시집을 발표했던 선생님은 7.5조 (7자+5자 의 반복)인 이 동시를1950년 4월 <소학생>지에 발표했으며 그 해에 이 흥렬 선생님에 의해 작곡되었습니다.

한인현은 은석초등학교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9년 글짓기 교사 세미나 도중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그해 향년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흥렬 (1903∼1988. 작가, 작곡가)

이흥렬도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서, 일본 도쿄[東京] 음악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한 후 모교인 광명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곡을 시작했다. 1936년 홍난파와 같이 경성방송국 소속 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피아노 3중주단을 만들어 실내악 운동도 벌였다. 배재중학교, 풍문여자중고등학교,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 중에는 <봄이 오면> <바위고개> <코스모스를 노래함> <고향 그리워> <어머니의 마음> 등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군인이면 누구나 훈련소에서 목청껏 불렀을 <진짜 사나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도 선생께서 작곡하셨다고 한다



  비올리스트 Richard Yongjae O’Neil  


화려한 비올라 연주 풍부한 음색, 정확한 피치 세계가 주목하는 아름다운 청년 용재 오닐은 KBS ‘인간극장’을 통해 가슴 속 깊은 감동을 전해 준 주인공, 줄리어드 음대 역사상 최초이자 또 유일한 사람으로서 대학원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한 천재 비올리스트인 리처드 용재 오닐은, 2006년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에버리 피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이는 그의 내면 속에서 발현되는 태생적 한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운 감수성과 연주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나날이 성장 가속을 달리고 있는 젊은 유망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은 차기 거장으로서의 확고한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비올리스트로서는 최초로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받은 용재 오닐은 폴 뉴바우어와 도날드 맥아인스를 사사하였고 서던 캘리포니아에서 학사(마그나 쿰 라우데)를, 줄리아드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뉴욕에 거주하면서 예술에 대한 그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시 의회로부터 명예로운 시민상을 받았으며, 교육자로도 헌신하여 2007년부터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마테오 고프릴러가 만든 1727년 베니스 산 ex-Trampler를 쓰고 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차이
         

1. 비올라는 일반적으로 
   바이올린보다 크기 때문에 현도 깁니다. 
   따라서 같은 운지를 할 때 더 넓은 손가락 간격이 요구되고, 
   활도 끝까지 쓰기 위해서는 오른팔을 더 뻗어야 합니다. 
   비올라의 크기 때문에 
   비올라 연주자는 손이 특별히 크지 않다면 
   빈번한 하프 포지션의 사용과 포지션 이동이 필요하지만, 
   첼로만큼은 아니다.
2. 비올라에는 보통 바이올린보다 굵은 현이 쓰입니다. 
   때문에 현의 반응이 조금 느린데, 이는 만약 비올라 
   연주자가  바이올린 연주자와 동시에 음을 시작해야 한다면, 
   비올라 연주자가 조금 더 먼저 활을 써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굵은 현을 연주하는 것은 활을 사용할 때 더 많은 
   무게가 필요하다.
3. 바이올린에서 비올라, 첼로로 가면서 더 굵은 현을 짚게 
   되는데, 바이올린이 손가락 끝으로 현을 짚는다면, 
   비올라는 그보다 첼로에 가깝게, 좀 더 손가락 살  
   부분으로 현을 짚습니다.
4. 바이올린은 선명하고 고음을 연주하는데 
   반면 비올라의 경우에는 중음이며 어둡지만 따듯한 음색을 
   내게 됩니다.  비올라의 활의 무게는 보통 70 - 74g 으로 
   바이올린 활의 무게 58 - 61g 보다 무겁다. 
   이 차이도 비올라의 활 테크닉을 바이올린과 다르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음악은 '영혼의 울림'

꽃의 아름다움은 생각에 머물고 음악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머문다.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사랑의 울림이다.

사랑의 울림이 마음으로 다가오면 사랑은 눈을 감게하고 마음의 호수에 별이 되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는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에 뜨거운 심장이 사랑을 안고 가슴안에 있는 것이다.

심장의 고동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랑의 노래가 뛰는 맥박으로 사랑을 깨워 영혼으로 찾아가는 것 아닐까.


그것이 음악의 향기요 영혼의 울림이기에 마음의 평화로움이라고 하늘이 침묵을 지키며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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