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6.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1코린3,18-23 루카5,1-11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전례의 주요 목적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위로요 치유입니다. 더불어 기쁨과 평화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남의 은총의 선물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피정 강의 때마다 자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통한 참 귀한 은총의 선물이 참 나의 발견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이뤄지는 회개와 겸손이요 이어 참 나의 발견입니다. 주님과 만남을 통한 참 나의 발견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은 평생과정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알아감과 동시에 나를 알아가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참나의 발견도, 앎도 불가능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자기 발견-주님과 만남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시몬의 만남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만남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주님은 시몬과 대화를 주도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깊은 데는 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풍성한 삶의 의미를 잡아내야 할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의 깊은 내적 갈망이 감지됩니다. 몹시 목마르고 배고픈 시몬의 영혼같습니다. 그대로 주님을 찾는 갈망일 수 있습니다. 어제 수녀님과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수녀원 입회전 늘 진리를 찾는 갈망이 있었기에 마침내 수녀원에 입회하여 지금까지 살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정이 성소의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시몬의 고백에서 허무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참으로 열심히 일했는 데 삶의 허무만 가득한 모습입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리니.”
시몬의 심정이 아마 이러했을 것입니다. 중년 넘어 이런 심중의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와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시몬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시도하는 시몬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주님과 만남을 통한 기적의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더 큰 기적은 시몬의 자기 발견에 있습니다. 주님과 만남을 통한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참나를 발견한 베드로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 많은 자신의 얼굴을 본 시몬입니다. 주님과 만남을 통해 자기를 발견한 시몬, 바로 이것이 회개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겸손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남이 없이는 구원도, 회개도, 겸손도 없습니다. 진정한 내적변화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진정 내적혁명의 요체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과정이 이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목표하는 바도 이런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에 있습니다. 각계 각층 지도자들이 정말 기도하여 주님을 만나고 자기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을 만날 때 첫 일성은 늘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주님과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답은 주님뿐입니다.
시몬과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과 만남의 기적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지혜롭게 되기 위해 어리석은이가 된 세 어부들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세 어부들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십니다. 제꾀에 제가 빠진다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십니다. 참으로 세상의 눈엔 대우大愚가 하느님의 눈엔 대지大智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듯 하나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바오로의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가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런 통찰에 이른 이들이 진정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자들이요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더불어 소개하고 싶은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님의 ‘베네딕도 전기’ 머리말 1항의 일부 요약입니다.
“베네딕도는 품행에 있어 나이를 앞서 갔으며 어떤 향락에도 마음을 뺏기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서 좋은 세월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꽃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세속을 먼지와 같이 업신여기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갈망하면서 거룩한 수도생활 방식을 모색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유식한 분이시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셨고, 지혜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
오늘 복음의 세 어부 출신 제자들과 제1독서의 바오로와 일맥상통하는 베네딕도 성인의 모습입니다. 마침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어부는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이 셋을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운명적 만남입니다. 만일 이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 제자들과 우리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만일 했다면---’이라는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만일이나 우연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우리를 당신 섭리에 따라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다시 산대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늘 새롭게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참 나의 발견에 참행복과 기쁨에 평화의 구원입니다.
세상의 눈에 어리석은 이들 같으나 하느님의 눈엔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닮아 어리석어서 지혜로워진 파스카의 신비를 사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어리석은 듯 하나 실로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누가 주님의 집에 오늘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