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은총-진실과 겸손, 인내와 믿음-
2018.8.27. 월요일 성녀 모니카(332-387) 기념일
2테살1,1-5.11ㄴ-12 마태23,13-22
오늘 복음을 보면서 회개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참회로 시작하는 이 거룩한 미사가 참으로 고맙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진실과 겸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새삼 회개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가 힘든 오늘 복음의 위선자들로 지칭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에 이어,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라는 주님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앞서 행복선언에서 “행복하여라”라는 말마디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위선자들을 혐오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가 힘든 똑똑한 바보들이 위선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주님의 깊은 아픔, 좌절감, 심판 예고로까지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불행하면서도 불행을 모르는 참으로 무지의 어리석음에는 답이 없어 보입니다.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이들 마저 막아버립니다. 개종자 한 명이 생기면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악의적이기까지한 무지입니다.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눈먼 인도자들입니다.
참으로 답이 없는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똑똑한 듯 하나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이 골수에 까지 깊이 든 당대의 엘리트층인 대부분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무지의 병이자 무지의 악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몰라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허영과 탐욕, 교만에,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 뭣이 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것이 모르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새삼 자기를 알아 진실과 겸손, 지혜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의 위선적이고 눈먼 삶을 살펴 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입니다.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데오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은총과 평화요 진실과 겸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대목에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여러분은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 여러분을 자랑합니다.---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흡사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잘 겪어내며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인내와 믿음, 진실과 겸손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었기에 이런 인내와 믿음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 기념일이고 내일은 그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념일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부저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의 삶의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준 성녀 모니카의 삶 역시 오늘 복음의 위선자, 눈먼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제2독서의 테살로니카 신도들을 뛰어넘는 인내와 믿음의 성녀 모니카의 임종전 그 아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남겨 준 고백이 너무 아름답고 깊어 나눕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오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이 마당에 여기서 아직도 뭘 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승살이에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나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하느님께서 나한테 과분하게 베풀어주셔서 네가 지상 행복을 멸시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을 보게 해 주셨구나. 그러니 여기서 내가 더 뭘 하겠느냐?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 지 아흐레 되던 날, 어머니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 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 났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의 고백록(성염 역; 335-337쪽 참조)'에서 그대로 인용한 참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가 자녀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끈임없는 회개가 하느님과 나를 부단히 깨달아 알아가게 함으로 위선적 눈먼 무지의 삶에서 벗어나 진실과 겸손, 인내와 믿음,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