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포기, 희사, 추종-|………◎ 이수철♡신부
영원한 생명 -포기, 희사, 추종-
2018.8.20. 월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1090-1153) 기념일 에제24,15-24 마태19,16-22
오늘은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는 수도생활 중, 늘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Ad quid venisit)?”, 자문하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합니다. “수도자는 무엇인가?” 매일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하는데,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질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물어야 답도 나옵니다. 비단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너는 왜 여기 살고 있느냐?”자문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진행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꼐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부자의 본질적 질문입니다. 부자의 내적 갈증의 표현입니다.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관심사도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부자의 질문에서 문제점이 부각됩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부자에게는 겸손이 빠져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하시며 부자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변을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모두 이웃과 관계된 계명들입니다. 사실 이대로 지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부자는 이들을 준수했다 하니 부자는 참 좋은 모범적 신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위 계명들을 다 지켰어도 부자의 내적 갈증은 여전했음을 봅니다. 부자의 이런 내면을 통찰하신 예수님은 부자에 맞는 극단의 처방을 제시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모두에게 이런 처방을 주시지 않는데, 부자에게만은 이런 극단적 처방을 주십니다. 그만큼 부자의 내적 갈망이 컸음을 봅니다. 바로 윗 복음 말씀은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을 회두시킨 결정적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에게 재산 포기와 희사, 그리고 추종을 명하신 것입니다.
세부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나무들만 보고 숲은 못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부적인 계명 준수에다 집중하다 보면 숲인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아주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끊임없는 포기와 나눔을 통해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계명을 지킴과 주님을 따름은 반드시 함께 해야 합니다. 부자의 최종적 반응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지니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부자가 젊은이였음이 알려집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아마 이런 소유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 젊은 부자를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부자의 내적 갈증이 어디 있었음을 봅니다. 바로 그 많은 재물도 그의 내적 갈증을 해갈시킬 수 없고, 포기와 희사후 주님을 따라야만 내적 갈증도 해갈되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님의 처방이었는데 실격한 젊은 부자입니다.
복음의 묘미는 항상 결론 내리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젊은 부자의 이어지는 반응이 궁금합니다. 부자는 젊으니까 기회는 열려있습니다. 상상컨대 분명 주님을 만나기 전과는 달라졌을 것이며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언젠가는 주님을 찾아, 주님을 따르는 제자직에 동참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한계와 부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며 은총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며 하여 많이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값싼 은총도, 값싼 구원도,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봅니다. 끊임없는 포기와 나눔의 희생과 주님을 따르는 추종이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 참된 주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의 희생은 얼마나 큰지요. 복음의 젊은 부자는 실격했지만 제1독서의 에제키엘은 합격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을 예표로 이스라엘의 성전이 더럽혀져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에제키엘의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도 흘리지도 마라.”
바로 에제키엘 아내의 죽음이 예표하는 바, 더럽혀진 성전입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 집안에게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상징이 됩니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자기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는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에제키엘의 일편단심 하느님 사랑이 감동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아야 합니다. 신앙은 진위眞僞는 순경順境이 아닌 역경逆境중에 드러납니다. 어제 읽은 공감이 되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섭리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병들고 죽는 것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통틀어서 생명입니다. 태어나서 건강하게 사는 것만 삶으로 인정하는 문화는 잘못된 것입니다. 기운이 팔팔하고, 성생활도 왕성하고, 머리에서 윤기가 나고, 얼굴도 잘 생기고, 이런 게 ‘표준’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이런 병든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을 들여 성형외과를 가든지, 보약을 먹든지, 화장을 하든지 건강한 상태로 복원하려고 안달을 해요. 이게 얼마나 ‘천박한 문화’입니까? 이게 잘못되었다고, 그래도 희미하지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유일한 사상계가 가톨릭교회입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을 비롯한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 오늘 기념하는 클레로브의 베르나르도 성인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바로 우리의 병든 문화, 병든 사회를 바로 잡아 줍니다. 한결같이 자기를 버리고, 나누고, 주님을 따를 때 참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선사하시어 당신을 항구히 잘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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