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이 사랑했던 기생 두향(杜香) |◈─……고전글♡漢詩
산후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아내 권씨는 좀 정신이 모자란 여인이었다.
퇴계가 어느 날 조문을 가려다 도포 자락이 헤어진 것을 보고
아내에게 꿰매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아내는 빨간 헝겊을 대서 도포를 기웠다.
그는 말없이 그 도포를 입고 조문을 갔다. 사람들이
그의 도포 자락을 보고 물었다.
“흰 도포에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예법에 대해 묻는 말에 퇴계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는 빨간 헝겊일망정 도포를 기워준 아내의 마음을 더 샀던 것이다.
이처럼 퇴계는 넓은 마음으로 좀 모자라는 아내를
이해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아내도 그의 나이 4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아내와 사별한 퇴계는 48세 때 둘째 아들을 잃었다.
그 무렵 그는 마침 단양군수로 갔다가 관기 두향을 만났다.
그의 세 번째 여인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두향은 어려서 일찍
부모와 사별하여 단양고을 퇴기인 수양모 밑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녀는 13세가 되었을 때 수양모에 의해 기적에 올려졌으며, 16세 때
황초시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석 달만에 남편 황초시가 세상을 떠나자,
두향은 다시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어 단양 관기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거문고를 잘 타고 매화와 난초를 특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온 것은 아마도 두향이 남편을 잃고
다시 관기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팔청춘 16세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관기가 되어,
두 아내와 사별한 채 둘째 아들까지 잃어 상심에 젖어 있던
48세의 군수를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하였던 모양이다.
두향이 매화를 극진히 아끼고 좋아하였듯이,
퇴계 역시 매화를 사랑하였다.
누가 먼저 매화를 좋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화가 그들의 사랑을 접목시켜주는 상징적인
꽃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기생 두향(杜香)-
두향(杜香).
관비였지만 총명하고 학문과 예술의 깊이가 두터웠다고 합니다.
동방 최고의 선비로 칭송받던 퇴계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두향은 조선시대 단양 태생의 관기(官妓)로 시와 거문고에 능해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그를 일편단심 사모했으나,
퇴계의 단양 시절은 열달만에 끝나고 풍기군수로 다시 전근을 가게 됩니다.
그것은 고을 수령은 임기가 보통 5년인데,
그의 넷째 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까닭이었습니다.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하여
퇴계는 고개 너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되는거지요.
이를 '상피제도'라 한답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단양을 떠날 때 퇴계의 봇짐 속엔 수석 두 개와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하네요.
그는 이 매화를 평생 애지중지했다고 하지요.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에
내려갔을 때도 이 매화와 늘 함께 했다고 합니다.
지금 도산 서원에 있는 매화도 그때 그 나무의
후손이라고 한다지요.
그는 도산서원 입구 한켠에 절우사(節友社)란 정원을 꾸며놓고
거기에 솔, 대, 국화, 연(蓮)과 함께 매화를 심고,
자신을 포함해 절친한 '여섯 벗'이라 하며 즐겼다고하지요.
다음은 퇴계 44세 때 매화를 읊은 작품.
"막고산(?姑山) 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
바람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여들기 싫어하고
천년이라 고산(孤山)에 한 번 웃음 웃네."
죽기 직전 그의 유언은 이 매화꽃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지요.
선조 3년(1570년) 12월 8일 아침. 시봉하는 사람에게 분매에
물을 주라고 명한 뒤 저녁 5시에 편안하게 세상을 뜨셨다고 합니다..
한편 퇴계가 10개월만에 단양군수 직을 떠나자,
그녀는 퇴적계(退籍屆)를 내놓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 기생을 면했다고 전해온답니다.
두향은 구담봉 앞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고,그후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임종, 나중에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전하는데,
이렇게 유언했다고 하는군요.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가 거북바위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그녀는 유언으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한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답니다
그후 이백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라는 문장가는
다음과 같이 시 한 수 읊었답니다.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두향의 무덤. -단양으로 들어서는 동쪽 문.
옥순봉으로 가는 물길을 따라 가다 건너편에 있다는군요.
그리하여 지금도 잡초가 우거진 두향의 무덤이
단양에 남아있게 됩니다.1976년 소설가 (故)정비석은
그곳을 직접 찾아 충주댐이 완성되면 두향의 무덤이
수몰돼니 단양군수에게 이장을 청하여 지금의
안전지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소설가 정비석(1911-1991) 씨가 쓴 명기 열전에는
두향이 죽령을 넘어 풍기로 찾아가 먼발치에서
퇴계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단 10개월의 만남만으로 후세 사람들이 알만한
그리움을 앓고 갔으니, 두향이 퇴계를 찾아 죽령만 넘었겠는가!
그 마음은
구름도 넘고 달도 넘어
퇴계를 찾고
한숨은
밤마다 울장을
넘었을 것이지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제나 저제나
사람의 피와 혼을
말리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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