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에 농사를 짓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준수한 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 섬세한 배려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참으로 믿음직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촌을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 청년은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어느 날 컴퓨터를 장만하고 인터넷을 통해 도시에 사는 젊은 사람들과 카페 활동을 하다가, 어느 여자와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닉네임은 "바다"였고 여자는 "초록물고기"였습니다. 청년이 보기에 여자는 박학다식하면서도 검소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듯 하였으며, 농촌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를 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여자와 메일을 주고받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청년은 자신의 가슴 속에 그녀를 향한 분홍빛 사랑이 싹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메일 1000여통을 주고 받으면서 두 사람이 무척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담아 프로포즈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까워지고자 할수록 초록물고기는 점점 움츠려들며 멀어져 갔습니다
마치 눈덩이에 입김을 불어 넣어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고자 하면, 그 온기에 녹아 작아지는 눈덩이처럼 여자는 자꾸만 작아졌습니다. 청년이 사랑을 고백하지 전에는 하루에 열통씩 오가던 메일이,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는 일주일을 기다려야 답메일이 오곤 했습니다. 그마저도 늘 한 두 줄이었습니다. 청년은 절망했습니다. 그토록 믿어왔던, 또 믿고 싶었던, 늦게 찾아온 사랑에 더욱 더 절망했습니다.
‘누구도 시골은 싫은가 보구나. 다 이상일 뿐이야.’ ‘나처럼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농촌을 지키고자 하는 내가 바보지.‘ ‘누가 봐도 이건 바보짓이야.’
그렇습니다. 동기들이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자 할 때, 농촌이 우루과이라운드로 신음할 때, 그는 농촌을 지키고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촌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청년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닉네임이 "초록물고기"란 것만 알 뿐,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이렇게 빠져버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던 자신이 이제는 초록물고기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째 메일의 수신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다시 여자에게 정말로 절박한 마음을 담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너무나 절실해서 가슴으로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남들은 쉽게 잠드는 밤에,
술기운을 빌려서 잠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맨 정신으로 잘 수 없을 만큼 심란한 이유를...“
“비오는 밤, 사람이 그리워서 여기저기 수첩을 뒤적여 봐도, 맘 편하게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전화기를 들지 못할 정도로 서글퍼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을...“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걷는 거리를, 혼자서 느릿느릿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왜 무거워 하는지...“
“누가 건들지 않아도 깨질 것처럼, 바람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기댈 사람이 없어 늘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둘 데 없는 그 사람이 느끼는 고독의 부피를...“ “여기에 질식되어 죽을 것 같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가슴으로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사랑하는 이가 그리워도 보지 못하는 아픔을 견뎌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 그의 속이 타서 얼마나 쓰린지!“ 한 달 후 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초록물고기에게서 답신이 왔습니다. “바다님, 나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하고 많은 시간 고민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를 앓은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어릴 적 덴 화상으로 얼굴에도 흉터가 많이 남아 있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커녕, 집안에서 어두운 커텐으로 햇살을 가리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몸마저 이러니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 동안 사이버 상에서 다들 저를 보면 그만 돌아섰습니다.“ ‘그 이후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워 저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먼저 돌아서곤 했습니다.“ “사랑을 하기도 전에 버림받는 제 자신이 너무 가여워서지요. 바다님한테서 메일을 받은 순간, 진정 기쁘고 설레었으나, 바다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다시 아픔을 줄 수가 없어서 바다님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청년은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자의 소식이었지만 그녀의 결점을 알고 나니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의 실망하시는 모습이 떠오르자 청년은 너무 괴로웠습니다. 육체보다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자부하던 청년이었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일에는 정신을 중요시하면서 자신의 일은 껍데기를 더욱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청년은 마음을 굳히고 그녀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사랑하는... 이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단 한 사람! 초록물고기님 당신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또한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자신의 결점은 오히려 나에겐 기쁨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위틈에 조용히 피어나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제비꽃처럼, 저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록물고기가 바다의 품에서 마음대로 헤엄치는 날 나는 비로소 내 스스로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초록물고기가 너른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칠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청년은 여자의 불편한 몸이 걱정되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지만, 청년이 사는 걸 직접 보고싶어 하는 여자의 부탁으로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여자는 그녀의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3월 14일 그 학교에서 가장 큰 나무 밑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14일 청년은 여자가 혹 못 찾을까봐 한 시간이나 먼저 나가서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애간장을 다 태우고 20분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교문에서부터 웬 날씬한 여자가 목발을 짚고 머리엔 노란 스카프를 두른 채 뚜벅뚜벅... 청년의 눈에 점점 크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초록물고기님이세요?" "그럼, 바다님 맞나요?" 여자는 부끄러운 듯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제 저를 보여드리겠어요."] 그녀가 안경을 벗고 스카프를 풀어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그 순간 청년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여자는 흉터 하나 없는 우유빛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여자는 목발을 내리고 자연스레 나무 밑 벤취에 앉았습니다. 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고백했습니다. "놀라셨나요?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의 바다에서 헤엄쳐도 될까요?" 청년은 물기어린 눈빛으로 와락 여자를 껴안았습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보리밭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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