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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해 연중 제6주일 - 바보 같은 사랑|☆...
수성구
2018. 2. 12. 03:19
2018년 나해 연중 제6주일 - 바보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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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 °♡。
◈ 요셉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2018년 나해 연중 제6주일≫
바보 같은 사랑
제1독서 : 레위기 13,1-2.44-46
제2독서 : 코린토 1서 10,31─11,1
복 음 : 마르코 1,40-45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교회 비판을 수행한 종교사상가였습니다. 철학은 이성적 사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주 종교와 부딪히게 됩니다. 믿음은 어느 정도 이성을 바탕으로 이해 될 수는 있어도 이성이 신앙을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키에르케고르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여 사랑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생을 살아야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스물네 살 때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녀 레기네 올센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합니다. 원래 그녀는 자신의 가정교사이자 키르케고르의 친구인 슐레겔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슐레겔로부터 떼어 놓았고, 마침내 3년 만에 구혼하여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과연 한 여자를 구속할 권한이 있는지 심사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저히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그녀와 결코 결혼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약혼녀가 먼저 파혼하도록 혐오스럽게 처신하고 타락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키르케고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는데도 계속 그녀를 예의주시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코펜하겐의 어느 거리에서 그녀가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그녀가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올센에게 말을 건넬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나같이 더럽고 미천한 놈이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년 후에 올센은 결국 슐레겔과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슐레겔은 1855년 서인도의 장관으로 부임되었고 올센 역시 따라갔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자신이 자초하긴 했지만 절망과 배신감에 그녀를 비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희망 또한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기나 저서에는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가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한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사창가에 단 한 번 갔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가지지도 못한 채 오히려 조롱만 받고 돌아왔을 뿐이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바보 같은 사랑,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평단문화사 2008]
모든 불행은 자신이 그래야한다고 자신을 규정해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이 그렇게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성적 숙고의 한계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예수님은 절대 칭찬받을 행동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복음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도 다른 고을로 복음을 전하자고 떠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병환자 한 사람에게 손까지 대며 고쳐주십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인간으로 손가락질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것과 접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율법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온 세상에 떠들고 다녔고 그래서 예수님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는 처지가 되셨습니다. 다른 고을로 복음을 전하자고 떠나놓고 길거리에서 만난 한 사람의 연민 때문에 고을들을 돌아다니는데 장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매니저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엄청 혼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대로 사랑은 이성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합친 것과 같은 존귀한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른 고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그 한 사람의 믿음에 보답을 주어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적으로는 손해 보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당신의 행동을 하십니다. 반면 이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성적 사고로 사람들을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지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매우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사랑의 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법이 이성의 법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공익광고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더니 도화지에 온통 검은 색만을 칠합니다. 가끔은 흰 곳을 남겨놓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렇게 검은 색만 쓰면 안 된다고 선생님이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결구 아이는 정신병원에 보내집니다. 정신병원에서도 검은 색으로 흰 도화지에 새까맣게 칠만 합니다. 누군가 그 도화지들을 모아 넓은 체육관 안에 펼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맞추다보니 아주 커다란 고래를 실물크기로 그린 그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확한 그림이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만 있으면 누구의 심판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요 정점입니다. 사랑이 이성에 의해 규정되면 항상 비극이 따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목숨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전쟁터로 가게 됐습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돌아오겠노라 다짐했고 여자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전쟁은 치열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매순간 숨통을 조여 왔지만 남자는 오로지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전투를 치러냈습니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남자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적진으로 진격 중 무릎에 폭탄 파편을 맞은 것입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한쪽 다리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불구가 된 남자는 이런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타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한편 애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여자는 어느 날, 남자의 전우로부터 그가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만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무심한 세월이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행여 여자의 눈에 뛸까 숨어 사는 남자에게 그녀의 결혼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남자는 가슴이 아렸지만 그녀가 행복해진다면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조용한 주택가 낮은 담장 너머엔 남자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편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만 잃고도 여자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남자는 숨이 막혔습니다.
“헉! 바보 같이..... 바보 같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과 한다고 합니다.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이성의 법이 가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로워져 누구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절에 가보면 십우도(十牛圖)라고 한 소년이 소를 잡으러가는 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한 사람이 참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우선은 자아가 자신인 줄 알고 자아를 찾아 잘 길들이지만 결국 자아가 사라지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 그렇게 자신까지 사라지고 그러면 자신은 공(空)이 되고 신적 존재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러면 그 신적 존재는 이 해탈의 경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그 사람을 세상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렇게 십우도가 끝납니다. 그렇게 자신이 비워지고 사랑의 법으로 채워진 이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심판 받을 자신이 없고 자신 안에는 누구도 심판 할 수 없는 하느님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적인 심판에 상관없이 사랑의 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시는 이유입니다. 타인의 이성적인 판단에 얽매이며 살아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참 자유는 사랑의 법으로 살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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