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이수철 신부님

주님의 참가족 - ‘인사이더insider’ 혹은 ‘아웃사이더outsider’?|………◎

수성구 2018. 1. 23. 06:15

주님의 참가족 - ‘인사이더insider’ 혹은 ‘아웃사이더outsider’?|………◎ 이수철♡신부

           






주님의 참가족 - ‘인사이더insider’ 혹은 ‘아웃사이더outsider’?


2018.1.23. 연중 제3주간 화요일
2사무6,12ㄴ-15.17-19 마르3,31-35

오늘 복음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누가 주님의 참가족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혈연血緣관계가 아닌 하느님과의 관계, 신연神緣관계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거리를 둘 것을 여러번 촉구하셨습니다.

결혼생활을 생각하지 말고, 당신보다 가족을 앞세우지 말고,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며, 식구들에게 작별인사하러 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런 요구를 따랐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적가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오늘 마르꼬 복음입니다. 다른 공관복음 마태복음이나 루카복음과는 달리 마르꼬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닌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비로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됨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혈연가족을 무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비결을 보여줍니다. 장소나 거리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입니다. 굳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의 ‘인사이더insider’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모습이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미쳤다하여 붙잡으러 나섰던 가족들이 집 문앞에 서서 연락을 취한 것 같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시다는 전갈에 예수님의 반응이 그 장면과 더불어 깊은 묵상감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 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 보시며 이르시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잘보면 두부류로 나눠짐을 봅니다. 영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예수님 주변의 ‘인사이더(insider;내부인)’와 예수님 밖의 ‘아웃사이더(outsider;외부인)’로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 주변에 세례받고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는 우리를 인사이더라 하면 밖에 있는 냉담자들이나 비신자들은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혈연가족도 아웃사이더에 속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 볼 수 없습니다. 단 한 분 마리아 성모님만은 당연히 인사이더라 할 수 있습니다. 온통 하느님의 뜻에 실행한 ‘예스맨yes-man’이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더 확실히 와닿은 느낌이라 ‘인사이더insider’ 또는 ‘아웃사이더outsider’라 부릅니다.

장소나 자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도, 또 혈연가족 한가운데 살아도 그가 진정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참가족인 주님의 인사이더라는 것입니다. 반면 그가 보이는 교회나 수도원에 살아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주님의 참가족이 아닌 주님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어디에 살든 주님의 참가족 인사이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사이더나 아웃사이더는 고정불변의 확정된 존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냉담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 주님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하면 주님의 참가족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참가족의 영원한 인사이더의 모범이 예수님과 마리아요 오늘 제1독서 사무엘하권의 다윗입니다. 시편 40장에서 인용된 히브리서의 예수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참가족임을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루카복음 1장 38절, 유명한 고백도 그분이 하느님의 참가족임을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과 유사한 맥락의 루카복음11장27-28절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참가족이 되는 참행복의 비결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겠다.”는 어떤 여자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그가 진정 하느님의 참가족임을 입증합니다. ‘하느님의 궤’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기뻐하며 춤을 추는 다윗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요. 마치 부모님을 한없이 좋아하여 부모님 앞에서 덩실덩실 재롱을 부리며 춤추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어린이와 같은 다윗입니다.

매일, 평생,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고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사랑, 형제들과의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참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행복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피정자들에게 자주 나누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그러니 우리 혈연가정공동체나 교회공동체는 부단히 주님의 참가족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공동체의 완성이요 유토피아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뜻을 충실히 실행하는 당신의 참가족이 되어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