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0월11일/복자 요한 23세 교황

수성구 2013. 10. 9. 12:43

고등학생 때 한 친구가 피정을 다녀온 뒤의 체험을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여느 피정 때보다도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기분 좋게 다른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본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그는 옆 친구와 이야기하던 가운데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격앙된 나머지 자칫 주먹다짐까지 벌어질 뻔했습니다. 앞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더욱 새롭게 살려고 다짐했던 피정이 끝나자마자 친구와 다투게 되어 속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뒤에 만난 피정 지도 신부님은 그 친구에게 오늘 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신부님은 피정도 중요하지만 그 뒤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친구에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이야말로 더욱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미사 때에 은총을 체험했으나 성당 문을 나오는 순간부터 화낼 일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직후에 오히려 성당에 가지 못할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짜증 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늘 염두에 두면서 성당 울타리 안뿐 아니라 그 너머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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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0월11일

복자 요한 23세 교황

Pope JOHN XXIII

Beato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재위 : 1958.10.28∼1963.6.3).

1881 at Sotto il Monte, Italy - 3 June 1963 at Rome, Italy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Canonized: pending

 

원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년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소토 일 모테에서 출생하여 1904년 사제서품되고,

라디니 테데스키 백작이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동안 그의 비서 겸 신학교수로 근무하였다.

 

 

뒷날 비오 11세가 된 아킬레라티와 친분을 맺었고,

1차 세계대전 후 교황청에서 행정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025년 아레오폴리스의 명목상의 대주교 및 1935년 아레오폴리스의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리아 그리스의 교황 사절,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1944∼1953년)를 거쳐 1953년에는 사제추기경으로 임명,

1958년 비오 12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업적은 23명의 새 추기경을 탄생시킨 일(1958.12)인데,

1962년까지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추기경들에게 세 가지 과제를 제출,

모라를 위한 교구 시노드와 일치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회법전의 개정 등을 제안하였고,

1960 년의 시도느는 로마의 지방문제를 토의하였다.

 

 

1962년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는 그의 재위기간 중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펼쳤다.

 

 

이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테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전례법규를 인가(1960년),

미사법전에 성 요셉의 이름을 삽입하였으며,

교회법 개정을 위한 교황위원회를 구성(1963년)한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또한 1960년 교회일치 진흥을 위한 사무국의 개설,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 가톨릭 인사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는 등 일련의 쇄신이 이어졌다.

 

 

 

바티칸공의회公議會  

Concilium Vaticanum. Councils of Vatican

 

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20차 공의회)

교황 비오(Pius) 9세에 의해 바티칸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

 

㉮ 트리엔트 공의회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개최된 이후

거의 300년 동안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았었다.

그 동안 일반사회 내에서는 합리주의, 자유주의, 유물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하느님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의 거부,

하느님의 실재 거부, 영혼성의 실재 거부 등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와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4넌 12월 예부성성(禮部聖省) 추기경회의에서 공의회 개최에 대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의회에서 취급되어야 할 안건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 1867년 6월 공의회 개최에 대한 공식발표를 함과 아울러

준비위원회로는 중앙위원회 산하 교의. 교회규율. 수도회. 포교 등 그 부속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868년 6월 비오 9세의 칙서 의 발표로 바티칸 공의회가 1869년 12월 8일 개최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 1870년 로마가 함락되어 무기한 휴회될 때까지

모두 4차 회기로 진행된 공의회에서는 많은 의제들이 논의되었지만,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또 공의회 회기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에 대한 것이었다.

14번의 총회와 64번의 연설에 걸친 토론 끝에,

결국 1870년 7월 18일 공개회의 투표에서 통과되어 교황은 정의를 발표하고 교령들의 비준을 선포하였다.

이 때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내용은 한 교령 중의 하나의 장(章)으로 채택되어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권 제한주의에 대해서는 종지부를 찍은 셈이나

교황 무류성에 대한 문제와 세계 공의회가 교리적 정의를 마련하기 위한 근거에서 볼 때

한낱 교황의 자문기관이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제4차 회기가 끝난 뒤 교황에 대한 주교들의 관계 등

다른 의제들에 대한 결정이 유보된 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해 교황은

단 한 평의 교황령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유명무실해진 공의회를 해산시킬 적당한 이유를 마련해 줌에 따라

1870년 10월 비오 9세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회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신앙과 계시의 속성(屬性)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들을 반포했을 뿐 그 밖의 문제들은 유보되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부정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독립된 종교단체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구가톨릭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②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0.-1965.12)(21차공의회)

요한(Joannes) 23세에 의하여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

 

㉮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에 관한 헌장을 반포하고

이탈리아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하여 무기한 휴회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세계공의회는 열리지 않고,

다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대처하기 위하여 레오(Leo) 13세, 성 비오(St. Pius) 10세,

비오 11, 12세들의 회칙들만이 반포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 말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공의회 개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959년부터 준비토록 하여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니,

결국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적으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통합시켜 새롭고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 그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 1960년 6월 5일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중앙예비위원회 및

부속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앙예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2년 7월에는 교황회칙 <회개하기 위하여>(Paenitentiam agere)를 반포하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회개하여 쇄신될 것을 촉구하였고,

이 ’회개와 쇄신’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기본정신이 되었다.

 

전체 4차 회의로 진행된 공의회는 회의 전 13개 예비위원회에서 67개의 논의사항을 준비토록 하였으나

실제 회기 동안에는 10개의 위원회와 한 개의 사무국이 활동하였다.

최종적인 헌장 초안을 마련하는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24명으로서 15명은 선출되고

나머지 9명은 교황이 임명토록 하여 전체적인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 밖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하여 초대된 각 교파의 성직자들이 입회인으로 참석하였고,

이들은 또한 요한 23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사무국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졌다.

 

 

㉰ 제 1차 회기가 시작되면서 토의되기 시작한 주제들은

전례, 계시, 그리스도교의 일치, 교회의 본질,

매스 미디어로서 이들 중 전례와 매스 미디어에 관해서는

2차 회기 때 헌장과 교령이 각각 반포되었다.

 

그러나 1차 회기가 끝나갈 때, 즉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는 사망하고,

밀라노의 지오반니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Paulus)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로운 교황 바오로 6세는 중단되었던 공의회가 계속될 것임을 발표하고, 9월 29일 속개토록 하였다.

제3차 회기 때 논의된 주제로는 교회, 신성한 계시, 주교들의 사목적 임무, 평신도 사도직,

그리스도교 일치, 종교적 자유,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주제들은 제4차 회기 때까지 계속되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회기가 끝날 때에는

모두 16개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즉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계시헌장>(Dei Verbum),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등

4개 헌장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

<주교들의 교회사목직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등

9개 교령과,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등

3개 선언이 그것이다.

 

 

결국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대사전에서-

 

 

복자 요한23세교황의 유해-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