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4월 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 제1독서 예레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복음 요한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어떤 광고에서 보았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오빠, 나 요즘 살 찐 것 같지?”
이 질문에 남자 친구는 망설이면서 “쪼금”이라고 말하지요. 그러자 여자 친구는 화를 내면서 “쪼금? 뚱뚱한 여자랑 다녀서 되게 힘들겠다. 우리 헤어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고는 다시 처음 질문의 화면으로 되돌아가서 남자 친구가 다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번에는 “아냐, 옛날하고 완전 똑같아.”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러면 옛날에도 뚱뚱했다는 거잖아. 우리 그만 만나자.” 다시 광고는 처음 질문의 화면으로 되돌아가서 남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여자 친구는 다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잘 모르겠어? 오빤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어? 우리 그만 하자.”
과연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어떤 심리학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선 이야기의 정답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사랑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듯합니다. 실제로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은 그 너머에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고 또 들리는 질문 자체에만 매여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2천 년 전의 예수님 말씀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말만을 들으려했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을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가 있지요.
유대인들의 비난은 예수님께서 돌 맞을 짓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당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이 이렇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인성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완고함을 깨드리기 위해서 당신께서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이 표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취한 적은 없었을까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고 단죄했던 적은 없나요? 분명히 옳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평가절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바로 이러한 완고함과 남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쫓아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결코 큰 데 있지 않다. 작은 것으로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법정). 광야에 세운 조지수도원.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 계십니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고고학자, 신부, 목동이라는 직업을 가진 세 사람이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에 갔습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협곡으로 유명하지요.
이 놀라운 경치를 보고서 고고학자는 “정말로 놀라운 과학의 경지로다.”라고 말했고,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작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목동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제기랄! 작품이고 나발이고... 소 잃어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네.”
서로 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 생각과 똑같을 것이라고 착각할까요? 그러한 착각이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조금 만 더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은 내 생각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야에 앉으니 참으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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