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선생이었던 지라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은 녹여였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때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퇴계 선생의 시 한 편이다.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아 갔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
두향에게 보내는 시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도산서원 매화
퇴계 선생과 매형(梅兄)
선생께서는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유별나
"내 평생 즐겨함이 많지만 매화를 혹독하리 만큼 사랑한다"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적고, 매형이라 불렀습니다.
퇴계는 생전에 매화를 매형 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꼈다고 한다.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매화와 묻고 답하며 풀어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